타이러브 2006.03.25 12:45 조회 11652

열분들은 칸차나부리 하면 제일 먼저 뭐가 퍼뜩 생각이 나시는가??????
“맞다!!!!! 내 태국을 좀 알거던~~!!! 내가 세 번 정도 가 봐서 태국을 잘 아는데~~에,,,” 하는 개 싸가지 피플들은 팟퐁 내지는 포세이돈 내지는 나나 플라자 같은 졸라리 엘레강스한 엔터테이먼트 한 곳이 먼저 생각나겠지만 “태국이 좋은데 먼 이유가 필요해야 합네까? 기냥 좋습네다!!!“ 하는 피플들은 당빠 칸차나부리 하면 “콰이강의 다리”가 생각날끼야. 그게 정석이고....

아~~ 물론, 태국이 졸라 후진국이고 밥 한 그릇 제대로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이고, 에이즈 천국에 거리는 드글거리는 땅거지 덕분에 졸라 지져분하고 여자 값 열라 싸다는데라고 생각하는, 태국에 대해 전혀 꽝인 피플은 “칸차나”라는 새의 ‘주딩이’가 칸차나부리 라고 할 수 도 있지만 마리.

칸차나부리에 대해서 멘트질 할라니깐 잘 들어바바......요.

태국의 76개의 짱왓(道)이 있다는 것 죄다 알지비?
그 많은 짱왓(道)중의 하나로서 국립공원이 5개나 있을 정도로 태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방콕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3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네더라 그것이다.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 경작지(하여튼 조~올~라 많다)와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가장 잘 먹고 잘 싸는 지방 중의 하나란다. 특히나 칸차나부리는 콰이 강의 다리와 신석기 시대의 고분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태국에서 자연경관이 수려한 폭포와 동굴, 평화로운 콰이 강과 정글 트레킹 등등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풍부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그 명성이 퍼져가고 있는 덕분에 주말과 휴일에는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각광을 받을 정도로 많은 태국인들이 찾는 곳이더라 그거이지.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각 골목(쏘이) 입구에 있는 골목 표지판이 죄다 물고기 모양이라는 것이다.




구람 칸차나부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 않은 둥???
울 나라 지명에 ‘논산,’ ‘금산’, ‘익산’, ‘부산’ 등등 요렇게 “산(山)”이라는 것이 많이 붙이 태국의 지명에는 “바로 이 ‘부리’라는 말이 많이 달라 붙더라 그것이지. ‘부리’란 ‘마을(Village)’, 을 의미한다. ‘찬타부리’, ‘민부리’, ‘ 쑤판부리’, ‘ 사라부리’, ‘ 촌부리’ 등등등..... 해서, 칸차나부리라는 의미는 “금(Gold)의 마을”이란 뜻으로 한 때 금이 많이 나와 붙은 이름이며, 현재도 찬타부리와 더불어 보석광산으로 졸라 유명한 곳이 바로 칸차나부리더라 그것이다. 알았음둥???

칸차나부리를 이야기함에 있어 콰이 강의 다리에 대한 인폼이 먼저 들어가야 할 듯 하여 여기서 잠시 콰이 강의 다리에 대해서 멘트가 들어가더라~~~ 그거지.

“피에르 볼레(Pierre Boulle)”라는 코쟁이 작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 피플의 원작 소설인 ‘콰이 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를 소재로 해서 ‘사막의 라이온’, ‘ 인도로 가는 길’, ‘닥터 지바고’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이 1957년 연출을 하고 ‘윌리엄 홀덴, 잭 호킨스라는 방새가 열연을 하였고, 특히 극중 니콜슨 대령으로 나오는 “알렉 기네스”라는 피플을 세계적인 뮤비 스타로 알리게 된 영화이기도 하지. 1957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편집상, 촬영상, 작곡상 등 7개 부문에서 아도를 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속의 다리는 칸차나부리가 아닌 스리랑카에서 영화 세트로 만들어진 것이며 영화속의 이야기처럼 영국군에 의해 완전 폭파되지는 않았다.

콰이 강의 마치를 개선가처럼 휘파람에 맞춰 부르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포로 수용소로 들어오는 꼬락서니가 거지 삼촌쯤 되어 보이는 일단의 영국군들.

1942년 지구촌 두 번째 맞장 뜨기가 한창일 때 일단의 영국군 부대가 전술상 일본군의 다리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서 일본군에 항복을 하고 콰이 강의 다리 공사현장의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게 되며, 매일 다리를 건설하는 일에 투입이 된다. 포로 수용소에 들어온 첫날부터 뽀다구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수용소 사령관인 사이토 대령과 “나두 뽀다구 계에서 잔뼈가 굵은 넘”이라며 목에 빵빵한 기브스를 한 영국군 포로 사령관이 니콜슨 대령은 장교 포로들의 작업현장 배치에 관련하여 대립을 하게 된다.

다리 건설에 투입된 영국군 포로들은 본부의 지시대로 작업 중 개김 내지는 졸라 부실하게 다리를 만드는 등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여 다리 건설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한다. 이에 뽀다구계의 거물 사이토 대령은 열 이빠이 받아가 다리가 기한내에 완공되지 않으면 자신이 할복을 해야 한다고 하며 부하들을 쥐 잡듯이 잡는다. 그런 와중에 니콜슨 대령은 부하 장교들의 힘을 얻어 사이토 대령에게 선진국의 과학적인 기술로 다리를 만들어 보겠노라면서사이토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니콜슨 대령은 나태해진 부하 포로들의 관심을 한곳으로 응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으며, 영국의 위대함을 포로 수용소 사령관인 사이토 대령에게 보여주고 싶어 영국군 포로들을 독려하며 다리공사에 박차를 가한다. 또한, 포로들 역시 니콜슨 대령의 카리스마에 뽕필을 받게되어 그 누구도 주딩이 내밀지 않고 그의 결정에 따르게 되며 다리공사는 아무런 문제없이 착착 진행이 되며 마침내 콰이 강의 다리가 완성되게 된다.

그 시각 영국군 본부에서는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게 될 다리를 폭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포로수용소에서 간신히 탈출을 한 미군장교의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콰이 강의 다리 앞까지 침투를 하게 되며 밤새 뺑이 치면서 다리 폭파 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군 포로들이 자신들이 완공을 한 다리를 그 유명한 ‘콰이 강의 마치(River Kwai March)’ 휘바람을 불면서 다리를 첫 번째로 지나가게 된다. 그들은 수많은 희생보다는 그들이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이 더 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침투한 특공대가 니콜슨 대령과 티격티격(?) 하게 되고 총에 맞은 니콜슨은 자신이 얼마나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엄청난 짓(?)을 했는지 상기를 하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각본대로(?) 쓰러지면서 폭파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다리가 폭파되고 마침 지나던 기차 역시 다리와 함께 강 밑으로 “콰이 강 오리 알”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버뜨, 데와, 그러나,,,,,,,,,,,,,,,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씹을 일이 있다.
우리는 콰이 강으로 대변이 되는 죽음의 철길을 떠올리면 당빠 일본군의 지랄같은 만행 내지는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와 풍토병에 의해서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던 그 비참함을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나락이 역시 “콰이 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 일본군의 다리 건설로 인한 연합군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 이하의 만행 같은 것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니미럴하게도 영화에서는 우리네가 알고 있는 잔인한 일본군의 만행 내지는 인간 이하의 대접 어쩌구는 눈 씯고 봐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죄다 구라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 단무지 군발이들이 영국 코쟁이 포로 군발이들 주리를 언제 틀까? 하고 기다렸지만 영화에서는 일본 단무지들의 연합군 코쟁이에 대한 잔인한 내지는 인간이하의 대접 내지는 개지랄 어쩌구 하는 만행 따위는 보여주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굳이 개지랄이라 하면 자신의 엘레강스한 멘트에 개긴 니콜슨 대령 덕분에 뚜껑이 제대로 열린 사이토 대령이 ‘니들 함 조때바바!!’ 하면서 코쟁이 장교들을 쬐약볕 아래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전부이다.

여러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내용들은 콰이 강의 다리 건설 와중의 일본군의 잔인함과 횡포를 그린 영화,,, 어쩌구. 죽음의 철도 건설을 위해 강제 착취된 연합군의 목숨 내지는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강제 노역,,,어쩌구 한다. 그런 멘트질 한 인간들이 정말 영화를 보고 멘트질 한 것일까? 영화만 놓고 본다면 죄다 구라라는 것이다. 구라!!!!

그럼 대체 콰이 강의 다리에 연결되는 철도를 왜 “죽음의 철도”라고 하느냐?
버마 전선과 인도 전선에 군수물자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하여 일본은 1942년 2월부터 시작을 해서 다음해 5월까지 1년 3개월 만에 철길을 완성하게 되거던. 통상 5년이 걸릴 철도공사를 단 15개월 만에 끝냈다고 한다. 총 연장이 415km인데 서울과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440km 정도라고 생각하면 그 짧은 공사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가히 짐작이 될 것이다. 그 1년 3개월의 공사 기간동안 연합군 포로 약 9만 4천여 명이 부상과 영양실조, 그리고 여러 풍토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하루에 약 200여명이 죽어간 것이다. 열대 풍토병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 기후상 악조건이 콰이 강의 다리를 포함해서 ‘죽음의 철도’라는 비극을 낳은 배경이 되었으며, 이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철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라 별명이 붙게 된 것이더라 그것이지.

특히, 죽음의 철도 여정 최고의 쏠림 구간은 타낄렌과 탐끄라새 사이에 있는 약 300m 정도 길이의 끄라새 다리(Krasae Bridge)라 불리우는 곳이다. 절벽을 깎아 길을 트고 그 위에 나무 교각을 놓은 뒤 철로를 만들었거던.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왼쪽 아래로는 콰이 강의 빠른 물살에 현기증이 나지만 죽음의 열차 탑승 중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겠다. 이 구간에서는 기관사 아저씨가 속도를 늦춰주는 써비스까지 하는데 이때 몸을 기차 밖으로 내놓고 만끽하는 스릴은 그 어떤 쏠림보다 24배 더한 새로운 맛이다. 특히, 칸차나부리 역이나 콰이강의 다리 역에서 기차를 탈 때는 꼭 왼쪽 창가에 앉으시라!!!
그래야 끄라새 다리에서 제대로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질질 싼다 질질 싸!!!!!

칸차나부리의 주요 관광지를 소개하겠다.
혹시 나중엔 칸차나부리 가게 되면 기냥 참고하시라는 의미 되겠다.

유엔군 공동묘지



2차 대전 중 즉음의 철도 공사에 혹사 당하거나 병들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연합군 병사 6,982명이 잠들어 있는 곳. 주로 영국, 호주, 네델란드 병사들이 잠들어 있는 이 묘지에는 당시 소속 부대명과 나이 계급, 동료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씌어져 있다. 묘지의 관리는 대단히 잘 되어 있으며 사방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고 대단히 평화롭고 한가로운 모습이다.


제쓰 전쟁 박물관(JEATH WAR MUSEUM)





1977년 설립된 야외 박물관으로 “왓 따이”라 불리우는 사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일본(Japan), 영국(England), 호주(Austraila), 태국(Thailand), 네델란드(Holland)의 영문 첫 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포로들의 열악한 수용소 생활상과 작업하는 모습들을 삽화로 접할 수 있으며 그 당시에 쓰던 물건들 역시 볼 수 있으며 박물관 내부는 당시 포로들의 수용소 내부와 같이 대나무를 연결해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차 대전 전쟁박물관 .



콰이 강의 다리 바로 왼쪽에 접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은 칸차나부리 전쟁의 역사를 벽화로 보여주고 있으며 왼쪽이 바로 전쟁박물관이 되겠다. 박물관 1층에는 당시 사용하던 무기류들과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상과 죽음의 철도 공사장면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친절하게 방명록까지 비치되어 있으니 가시거던 한 말씀 남기시라.

2층으로 올라가면 역대 미스 타일랜드들의 얼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중 1964년 미스 타일랜드 홍사쿨과 1988년 미스 타일랜드 폰팁은 미스 유니버스를 거머쥔 태국의 유명인사이기도 하다. 특히, 폰팁은 울나라 '장 윤정'이라는 피플이 미스 유니버스에서 아깝게 2등 할 때 "짱"을 먹은 졸라 쎄끈한 피플되겠다.

메치 러이 남




일명 “물에 뜨는 스님”이라 해서 흰색 옷을 입은 ‘메치’가 나와서 물위에서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데 신기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나락이가 칸차나부리 투어를 가서 시간 남으면 시간 땜방용으로 들어가는 사원 되겠다. 콰이 강의 다리 아래에서 조그만 배 기사 아저씨와 쇼부를 쳐서 갈 수가 있는데 사원이 대단히 한가롭고 한 때는 외국인 피살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원되겠다. 마침 우리 일행이 간 날은 졸라 뚱뚱한 아줌마(메치 아님)가 나와서 보여주었다.


졸라 심각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 前 동거인 부부되겠다.
하지만, 사원을 나오면서 별로 그렇게 신기하지 않았다해서 소심한 나락이 상처 입었다.

빛과 소리의 축제



매년 11월의 마지막 주와 12월초 첫째 주에 이루어지는 칸차나부리 최대의 축제마당 되겠다.
사실 이번에 처음 참가를 해보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실망이다. 일단, 칸차나부리 최대의 대목인지라 돈벌이에 눈이 멀어서 말도 않되게 비싸서 다리 근처 강 위의 식당은 자릿세가 1인당 400바트나 받고 준비는 졸라 어설프고 하여튼 영락없는 태국 스타일의 축제란 생각 엄청 했다. 특히, 콰이 강의 다리 옆의 전쟁박물관에서 조차 자리를 만들어 놓고 팔고 있을 정도로 돈벌기에 눈이 벌게져 있는데 보기 민망하더군. 콰이 강의 다리 축제 어쩌구 하는 그림 엽서에는 졸라 아뜨틱하게 불꽃놀이 축제를 보여주던데 우리가 본 불꽃놀이는 방콕의 러이 끄라통 때의 그것보담 24배 못하더라. 왕 실망. 콰이 강의 다리 교각을 스크린으로 사용해서 다큐멘터리 식으로 진행을 하는데 너무너무 지루해서 하품만 겁나 나오더라. 덕분에 막판에 불꽃놀이 내지는 뭔가 한번 보여주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모기만 졸라 물렸다. 결국 막판에 불꽃놀이를 하던데.... 에이~~~ 맘 상했다. 그 때 불만으로 나온 주딩이가 아직도 들어가지 않았다. 씨바!!!!!!


바로 이 엽서가 칸차나부리 어디서든지 쉽게 구 할 수 있는 빛과 소리의 축제 그림 엽서이다.
저런 불꽃놀이는 없다. 아~~ 구라의 끝은 어디인가?



콰이강의 다리 입구 양쪽에 설치해 놓은 임시 관람석 되겠다.
저 자리가 각각 100~400바트까지 받더라..


아리랑 식당



칸차나부리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한 한국 식당 되겠다.
들어가는 입구에 아크릴 간판으로 졸라 환영한다는 말씀의 간판을 볼 수가 있다.
전에는 콰이 강의 다리 옆에 한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간판 내렸더군. 물론, 간판 내린 것이 잘된 일이지. 언젠가 한번 손님들과 함께 갔는데 졸라 불친절. 무슨 개새끼가 들어와도 그렇게 쌩 까지는 않을텐데 단군이래 가장 쌩 깜을 당했다. 씨바!!!

하여튼,,,,
가끔 나락이를 비롯한 우리 조직 넘뇬들이 칸차나부리 당일 아유회를 가면 방콕에서 출발하면서 미리 도시락을 시켜놓는 곳이다. 그리고, 도시락은 봉고차에 실어서 미리 남똑 역에서 기다리게 하고 우리 일행은 기차타고 맥주를 빨면서 히히덕 거리면서 가고. 언젠가 남똑 역에 내려서 도시락 까먹던 와중에 우리 테이블 옆에 카오산에서 당일투어 온 한국 아가씨들이 밥을 먹고 있길래 김치를 비롯해서 몇 가지 반찬을 나누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잇었는데 2년이 지난 후 우연찮게 그 옆 자리에서 우리의 김치를 받아 드신 피플이 바로 노커팅 아짐 일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 어찌 세상이 좁다하지 않으리..... 그 때 작업 들어가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원. 휴~~ 몸 사려야지.
아리랑의 음식 맛은 손님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인데 바로 손님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의 음식 맛이 방콕의 투어식당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ㅋㅋㅋㅋㅋ

그런데. 이 곳 음식에 대해서 단군이래 최고로 높이 평가한 피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박 동식!!!
그의 말을 빌리자면 칸차나부리 여행중에 지와 비슷한 부류의 느끼한 일본 단무지 남정네를 한 명 알게 되어서 칸차나부리를 함께 다녔다나?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콰이 강의 다리 앞에 있는 식당에 갔는데 도무지 외국인과 함께 밥을 먹을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아리랑! 그곳 음식 값이 1인당 100바트인데 일본 단무지 넘이 박동식씨에게 계속 진짜 음식값이 100바트 맞냐고 몇 번을 확인하더란다. 그 넘은 음식값이 너무 싸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사실 박동식씨도 음식에 비해 값이 대단히 저렴했다고 했다. 결국 밥을 먹던 중에 그 녀석은 보험차원(?)에서 박동식씨에게 미리 100바트 줘버린 것이다. 혹시 밥 다 먹고 나중에 돈 더 내라고 딴 소리 할까바.ㅋㅋㅋㅋ. 해서 박동식 그 인간은 아리랑 음식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 녀석에게 좋게 남겨져 있을 거라고 졸라 유아틱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직도 자신이 외국넘에게 대단한 일을 해주었다고 자부심 비스므리한 것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참 사소한 것에 목숨거는 박동식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그렇다.

아리랑 식당이 있는 동네를 썽 쾌 라고 하는데 바지선 비스므리한 것를 띄워서 일명 “뱃놀이”나가는 곳이다.
배 위에는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 있고 싸이키 조명까지 갖춰져 있어서 강 위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야외 선상나이트 되겠다. 서울의 잘 나간다는 나이트 ‘쥴리아나’ 내지는 ‘돈텔마마’보담 24배 죽이는 곳이다. 우리 일행이 “메치 러이 남”을 보기위해 배를 타고 갈 때 시간이 오후 3시 정도였는데 그 멀건 대낮에 주위를 지나는 배들 위에서는 태국의 젊은 애들이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어떤 넘들은 배 꼭대기에서 콰이 강으로 다이빙도 하고 정말 즐겁게 잘들 놀더만.




칸차나부리 가서 시간낭비라고 생각되는 코스 내지는 관광지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사이욕 폭포와 에라완 폭포 되겠다. 그나마 사이욕 폭포는 봐줄만 하지만 에라완은 너무 했다. 울 나라 동네 뒷산에서나 볼 수 있는 시냇물(?) 떨어지는 것처럼 열라 작게 생긴 것을 폭포란다. 정말 너무 했다.
사이욕 역시 그것 하나 보기 위해서 그렇게 먼곳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참고하시라.

요번에 칸차나부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글질을 할려고 준비를 좀 했다.
특히, 방콕 노이(Bang Kok Noi) 역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해서 3시간동안 판자떼기 의자에 앉아서 견딘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며 엉덩이가 얼얼하다. 하지만, 기차안에서 만난 태국인들의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듯 하다. 방콕 노이 역(일명 ‘톤부리’ 역)에서 기차타고 칸차나부리 갈 예정인 피플들은 말리고 싶다. 그런 일정을 잡지 말고 칸차나부리 역에서 남똑 내지는 왕포 역까지만 기차를 타도 이가 갈리지 않을까 한다. 톤부리 역에서 남똑까지는 정말 “죽음의 철도”구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일부러 사진을 찍으로 기차를 타고 가서 썽태우 타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어떤 넘뇬인지 모를 피플이 나락이 디카의 사진 구경을 하면서 뭘 잘못 만졌는지 그날 가서 찍은 사진이 중간에 너무도 많이 삭제가 된 것이다. 해서, 맘이 너무너무 쓰리다. 힘들게기차를 타고 그 고생을 하면서 찍은 사진인데... 니미럴이 아닐 수 없다. 씨바.........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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