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러브 2006.03.25 12:17 조회 10489

불교국가이자 농업국가인 태국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 국가의 존립이래 외세에게 독립을 잃은적이 없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국가 존립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태국인들은 왕을 중심으로 지혜를 다하여 극복하였으며
일찍부터 들어온 서양의 문명과 문화에 대하여도 결코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 이질적인 외래 문화를 태국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신문화로 태국화하여 발전시켜 오고 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의식구조, 또는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면 태국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타이족의 고유문화와 불교문화, 농경문화 그리고 1932년까지 지속된 전제군주제의 영향-싹디나 제도-을 간과하여 태국인의 의식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태국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을 어떻게 하며 어떠한 행위를 할 것인가 하는, 또는 일상생활에서 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선택, 취향, 관심의 방향, 언행, 사고, 희망, 기호 등으로 표현되는 결정이 바로 태국인의 의식이자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엠브리(John F. Embree)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태국 사회는 '느슨하고 완만하게 구조화된 사회'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엄격히 조직화된 집단들이 결여되어 있고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규제받기 보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유롭게 개인간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인간의 상. 하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태국 사회구조의 특징이다. 이러한 것은 옛부터 국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국이었고,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회내의 위계적 신분질서가 근래 태국사회에로 계속 이어져 온 것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은 태국 사회내에서 집단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고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성향을 갖도록 했으며, 한편 태국인과 태국사회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해 온 불교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생활철학"으로써 태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해 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타이족의 "타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의미한다. 엄격한 형식이나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선호한다. 태국인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자유스럽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고 있다. "진짜 태국인은 농민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태국인은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전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업, 수산업, 목축업, 삼림업에 종사하고 있다. 땅을 중심으로 살고있는 이들은 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모임이나 행사, 축제가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온 동네사람들은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낙천적이다. 땅이 생활의 원천인 이들은 별로 이사를 하지 않고 사회적 신분의 변화도 거의 없다. 대신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가족을 중심으로한 응집력이 강하며, 전통적으로 가족중심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소비자와 생산자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농민들은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인습이나 관습에 집착하며 변화에 스스로 적응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도시인보다 느리고 소극적이다. 따라서 태국인들은 깊은 사고를 하거나 창조적 고통을 기피하고,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기를 바라며 일의 결과가 좋던 나쁘던 상관하려 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영국인들은 연구하는데 재미를 느끼고 미국인들은 일을 하는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면, 태국인들은 일을 보는 것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개인의 감정, 느낌, 관습에 의존하는 성향이 비교적 강하며, 원칙이나 이념보다는 자유를 선호하고 개인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효도함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은혜를 모를 때에는 "아까딴유"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체면을 중시하여 결혼, 장례식, 각종 잔치, 보시 등의 일상 생활상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낭비도 서슴치 않는다.



또한 태국은 권위주의 사회이며 신분사회이다. 건국이래 태국은 왕을 정점으로한 통치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1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여 쑤코타이 왕국을 건립한 이래 1932년에 입헌혁명에 의해 민주주의 제도가 들어올 때까지 태국은 전제군주인 왕을 최고의 통치자로 한 절대왕국이었다. 쑤코타이 왕국에서 아유타야 왕국, 톤부리 왕국, 그리고 랏타나꼬신 왕조(현 짝끄리 왕조)에 이르면서 왕의 성격은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즉 탐마라차(Thammaracha, Dhammaraja, 정의로운 왕, 법왕)의 성격과 신왕(Thevaraja), 생명의 주인 (Lord of Life), 그리고 전 영토의 주인 (Lord of Land)의 성격을 지닌 카리스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싹디나 제도에 따르면 태국인들은, 특히 평민은 누구나 상전을 섬기게 되어 있다. 평민은 왕이나 왕족, 또는 관료를 상전으로 모시고, 매년 일정기간씩(처음에는 6개월이었으나 아유타야 왕국 말기에는 4개월, 짝끄리 왕조 초기에는 3개월로 단축 됨) 상전을 위하여 경작하고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등 봉사하고 부역을 하여야 했다. 상전들은 사법권이 없는 평민을 대신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상전과 평민과의 관계를 흔히 후견인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라고 하고 있다. 이 후견인 관계는 태국인의 의식속에 자리잡아 아직도 인간관계를 비롯한 생활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사회는 1932년 6월 24일에 입헌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잘 유지되어 공적인 면에서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엄격히 강조되는 사회였지만 사적인 인간관계는 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롭고 평화롭고도 낙천적이다. 왕실 및 고위 관료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도입되고 독립유지를 위한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평민의 부역제가 폐지되고 노예제도 해방되었다.


태국인들의 의식은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라는 의식을 굳게 믿는다. 특히 악과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후손이 받는다고 믿어 공덕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아침마다 탁발나온 승려에게 음식을 바치거나 절의 사업, 예를 들어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원을 수리하거나 승려의 여행, 승려에게 일용품을 지원하는 일 등등은 "탐분(make merit)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어려움에 처한 다른사람이나 동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자비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여긴다.

엣부터 사원은 태국인에게 있어 생활의 중심지이며, 승려는 생활의 스승이자 안내자였다. 그러므로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창고,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하며,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외에 스승, 상담자, 신문물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의 가교 역할 등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은 시골일수록 강하다. 한마디로 불교와 사원, 승려는 태국 사회의 보수성과 일체감의 상징이며, 정신적 총체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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