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러브 2006.03.25 12:18 조회 8367

태국에는 1932년 입헌혁명으로 쑤코타이 왕국(1238-1350) 이래 약 700년간이나 지속되어 왔던 절대군주제가 붕괴되었다. 혁명 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래 태국에는 모두 3명의 입헌군주가 즉위했다. 최초의 입헌군주가 되었던 라마 7세(1925-35)는 혁명 주체세력과의 알력을 빚던 중 1935년 퇴위했다. 두 번째로 즉위한 라마 8세(1935-46)는 즉위 당시에 성년의 나이에 이르지 못하여 섭정이 그 역할을 대신하던 중 1946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어서 현재의 태국 국왕인 라마 9세, 푸미폰 국왕(Bhumibol Adulyadej)이 즉위하게 되었다. 1946년 즉위 당시 19세였던 푸미폰 국왕은 스위스의 로잔느 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1950년 귀국하여 공식적인 대관식을 치른 후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재위 반세기를 넘긴 푸미폰 국왕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태국사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오늘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다른 국가의 입헌군주와 비교해도 탁월할 것이다. 카리스마를 한 인간의 비범한 자질로 정의한다면 푸미폰 국왕은 지도자로서의 비범한 자질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푸미폰 국왕의 카리스마는 태국 국민들이 쑤코타이 왕국 이래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상으로 인식해 왔던 탐마라차 왕권의 특징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탐마라차는 불교로부터 유래하는 이상적인 국왕을 가르키는 것으로 전통적인 태국 국왕들은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국민들은 이러한 국왕들의 비범한 자질을 존경해 왔다.

태국의 고대법전인 프라탐마끵에 의하면 탐마라차는 시법을 준수할 때만이 국왕으로서 정당성을 갖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시법은 국왕이 이상적으로 준수해야 할 10가지의 통치 덕목을 언급한 것으로 보시, 지계, 희생, 공정, 온화, 노력, 불노, 불해, 인내, 불역 등을 내용으로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여기고 그를 탐마라차라 불렀다. 따라서 탐마라차는 법을 준수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갖게 되며 법을 거슬러서 불법을 저지르는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 당하며 이러한 왕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일은 정당화되기도 했다.


1946년 치루어진 대관식에서 푸미폰 국왕은 "모든 태국 국민들의 복지를 위하여 법에 따라 통치할 것" 임을 선언한 이래 재위기간 중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우선 왕은 법의 가르침을 충실히 수행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역사상 모든 탐마라차가 행했던 관례에 따라 단기간의 출가 경험을 갖게된다. 1956년에는 왕실사원에서 대정승의 주재아래 수계식을 거행하고 푸미파로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어서 1956년 10월 22일부터 11월 5일까지 버원니엣 사원에서 단기간 승려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왕은 탁발의식을 행하고 엄격한 계율의 수도생활을 함으로서 법을 실천하는 탐마라차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푸미폰 국왕의 탐마라차로서의 자질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국왕개발계획이다. 그는 이 계획을 통하여 국민들의 복지향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태국 국민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왕권으로 인식했던 가부장적이고 탐마라차적인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임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다.

푸미폰 국왕이 즉위한 후 가장 역점을 두었던 입헌군주로서의 활동은 지방의 국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었다. 국왕의 지방여행은 1955년 경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 방문지는 태국에서 사회, 경제적인 상태가 가장 열악한 동북부지방이었다. 국왕의 동북부 방문은 이후 그의 지방 방문의 모델이 되었으며 북부, 남부, 서부의 다른 지역까지 방문의 기회를 확대하였다. 오늘날 푸미폰 국왕과 왕실 가족은 일년의 절반 이상 지방을 방문하고 있다. 지방 순시를 통하여 푸미폰 국왕은 국민들의 행과 불행에 대해서 직접 귀를 기울임으로써 쑤코타이의 자비로운 아버지같은 왕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시법에 나타나는 보시, 자기희생, 노력, 인내 등의 덕목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행복의 추구를 위하여 국왕개발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국왕, 태국 역사상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국왕이 되었다. 따라서 태국 왕실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중노동, 막중한 책임감, 끝없는 인내, 그리고 국민들에 대해 모범을 보이는 등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국왕개발계획 중 몇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1. 농업개발계획


농업개발계획 중 대표적인 계획은 인강강우 연구개발계획과 물소은행계획이다.

국왕은 1971년 인공강우 개발계획을 실시했다. 사실상 국왕은 1956년 인공강우 만들기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1969년 니컨랏차씨마도의 빡청군에서 최초로 인공강우 만들기에 성공했다. 1971년에는 실제로 농민들에게 이 계획의 혜택이 돌아갔다. 현재 국왕은 화학물질과 드라이 아이스를 실은 로켓을 높이 쏘아올려 구름과 인공강우를 만들어 농업개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물소은행계획은 농민들에게 물소를 빌려주는 계획으로 고가의 물소 임대비를 경감시켜주기 위하여 1979년 실험적으로 쁘라찐부리도의 왓타나나컨과 싸깨우 지역에 2개의 물소은행을 만들고 가축개발국, 협동조합진흥국과 함께 민간기업이나 개인의 후원을 받아 이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현 국왕이 거주하는 칫타랄타 왕궁에는 낙농장과 우유 생산 공장이 있다. 낙농장은 1961년 설립되었으며 과학적인 젖소사육을 연구한다. 우유생산공장은 우유살균, 균질강화, 포장 및 시장배급을 목적으로 후일 설립되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우유는 저가로 일반에게 판매된다. 그리고, 1969년에는 분말우유공장을 만들기도 했다.


2. 보건, 위생개발계획


국왕이 주도하는 보건, 위생개발계획은 8가지가 있다.

왕실의료단 계획은 국왕에 의해서 임명된 왕실의료단을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하는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 치앙라이, 메홍손 등지에 파견하여 환자들의 건강을 돌보게 하는 계획이며 왕실의료단은 파견지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공동의료 임무를 수행한다. 이동왕실의료계획은 국왕이 방문하여 거주하는 지역에 왕실 의료진을 동행케하여 그곳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게 하는 계획이다. 특별의료계획은 국왕이 특별히 보건, 위생상태가 열악하고 교통시설이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에 의료단을 파견하여 상시적으로 주민들에게 의료서비스를 담당케하는 계획이다. 이동왕실치과의료단계획은 전국 오지에 치과의사 자원봉사단을 파견하여 초.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주민들의 구강위생을 담당케하는 계획이다. 또한, 외과의사 자원봉사단 계획은 수술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는 지역에 자원봉사 외과의사를 파견하는 계획이다. 파견된 외과의사들은 지정된 도청소재 병원에서 왕실의료단과 함께 수술을 담당한다. 이비인후과 및 풍토병치료를 위한 의료단 계획은 이 분야의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치료를 위하여 자원봉사 의료단을 파견하는 계획이다. 촌락단위의 기초의료담당자 육성계획은 촌락에서 일정한 정도의 교육수준을 갖춘 자를 선발, 훈련시켜 기초적인 의료기술을 습득케하여 기초진료를 담당케하는 게획이다. 마지막으로 왕실비서실 환자보호계획은 방콕에 입원해야 하는 환자의 입. 퇴원 수속일체를 전담케하는 계획이다.


3. 푸른 '이산' 계획



태국 전 국통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1,8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동북부지방은 건조한 고원과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단기간 지속되는 우기에는 홍수가 범람하며 1년 대부분의 기간은 건기로서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국왕은 1987년 육군주도로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 동북부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푸른 이산계획(이 계획은 일명 '국왕의 은혜계획'이라고도 불이우고 있다)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이 계획은 1987-1992년까지 5년간 한시적 계획으로 동북부 지방의 녹색혁명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국와개발계획의 성공을 가장 확실하게 담보하고 있는 것은 푸미폰 국왕이 갖는 재정적 능력이다. 푸미폰 국왕은 끁암 상업은행과 씨암 시멘트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후자의 기업은 현재 태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기도 하다. 이 두 개의 기업은 복합기업으로서 왕실재산국에서 경영에 참여하고 잇다. 또한 왕실 재산국은 40개의 기업과 관련을 맺고 잇으며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왕실 재산국은 현재 태국 제 2위의 자산가이며 4위의 투자가이다. 이러한 국왕의 정정적 능력은 국왕개발계획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푸미폰 국왕의 카리스마는 법적, 제도적인 장치에 의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영국와 일본같은 20세기 대부분의 입헌군주 국가에서는 왕실을 보호하는 법적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태국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태국 헌법 6조에는 왕은 지존의 존재이며 누구도 왕의 지위를 침해할 수 없으며 왕을 비난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태국 형법 112조에는 국왕, 왕비, 긍의 상속자나 섭정을 비방, 모욕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까지 형벌에 처해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푸미폰 국왕의 카리스마 유지에 역기능적으로 작용할 요인도 있다. 지금까지 국왕의 카리스마는 불교의 세계관과 함께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나 앞으로 정치적 가치와 구종의 세속화, 분권화를 지향하고 있는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 변화에 따라 영향력이 축소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태국 사회에서 "국가, 종교, 국왕" 이라는 락타이 이데올르기의 유용성과 입헌군주제의 실용성이 인정되는 한 급격하게 국왕의 카리스마에 대한 반대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역기능적 요인은 입헌군주제에 대한 도전세력의 존재이다. 지금까지 입헌군주제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은 태국 공산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국제의 폐지까지 주장한 적이 있으나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더욱이 1980년대초 정부의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소탕운동이 전개된 후 현재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상실되었기 때문에 국왕의 카리스마 유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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